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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PROTECTING, SHARING, AND LOVING Love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


Progress Love

윤미와의 관계는 점점 더 안정적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
서로 마냥 좋은 행복한 시기도 보냈고
서로 맞추어가는 어려운 시간도 보냈고
이제는 서로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대한 이해도 더 좋아졌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은 잘 정리 되었는데, 미래는 아직은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그 불확실한 부분 중 하나를 윤미가 오늘 건드렸다.
외국에 나가게 되면 정말 부부처럼 같은 장소로 이동을 해야 될 상황인데
-윤미가 한국의 생활을 포기하고 나를 따른 것이기에-
서로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좀 더 크게 벗어나버리면 어떻게 되냐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윤미는 ... 뭔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 자체로도 기분이 안좋을 수 있다.

어쨌든 이번 사건의 아는 형의 소개로 브리즈번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이미 서로 대화를 하고 살기좋은 퍼스로 가기로 계획하고 항공권도 끊은 상태.
근데 타일이라는 직종에 대해서 들은 말도 많고, 돈벌이도 그렇고,
혼자였다면 당연히 티켓을 취소하고 브리즈번을 갔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윤미의 반대. 만나서 얘기하자고하고 전화로 짧게 얘기했지만,
이유는 아마.. 위에 언급한 내용이거나, 정말 퍼스에 살고 싶거나..?
티켓을 취소해야하는 번거로움? 자신의 일자리를 구해주지 못한 오빠에 대한 아쉬움?

분명 나의 일이 있고, 또 사랑도 있다. 어떨 때는 과감하게 일을 추진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고,
또 사랑에 내 에너지를 투자해야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 균형점이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일단 내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대화해보고 결정해야겠다.
퍼스를 가나, 브리즈번을 가나 결국에는 사실상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나중에 비슷한 종류의 더 큰 사건이 터졌을 때의 연습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대화하고, 풀고, 해결할 지; 두 명이 움직일 때의 방법, 이것이 중요한 듯 보인다.


믿음에 대한 갈망 Love

믿음이라는건 정직한 단어인 것 같다.
아주 조금씩 쌓여가다가도, 어떤 실수라도 있으면 쉽게 녹아 내린다.
그래도 상대방의 말, 상대방 또한 나의 말에 여운이 길게 남는다.
행복하다가도 문득 찾아오는 내면의 의심, 불신.
처음부터 아무런 의심이 없다면, 완전한 믿음도 없는 거겠지.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100%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또 100% 믿는다고 믿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는 더욱 아니다.
최소한의 벽을 두고, 예의를 지키고, 가끔씩 의지하고, 가끔씩 혼자가 되는 것은 어떨까.
불안정한 마음은 좋지 않으니깐. 편안한 마음이 좋은거다.

믿음이란 본인이 가지려고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는 분명 강한 믿음이 생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하자. 그리고 사랑하자.
그럼 미래는 의미가 없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절대 후회는 없다.




학문하는 이유, 가야할길 -임성준 Word

불안이나 불확실성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보통 극한의 상황에 다다르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오합지졸로 흩어진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지만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무조건 뛴다. 방향도 모르면서 뛴다. 지금도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앞으로 뛰고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으니까 너도 나도 따라 뛴다. 방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뛰니까 너도 나도 같이 뛰는거다. 누구 하나 공포로 분열되어버린 자아를 멈춰 다스려 비상구를 바라보지 않는다. 많은 대학생들이 해외봉사, 토익, 회화능력, 다양한 공모전 수상경력 소위 스펙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목을 맨다.

하지만 스팩을 쌓는 것으로 만족스러운 삶과 직업선택의 자유 그리고 참된 앎을 얻을 수 있을까? 글쎄, 그건 고민해볼 일이다. 모두가 표준화된 스팩을 쌓으려 목을 맨다. 그리하여 이 時代의 거의 모든 대학생들의 포트폴리오가 완벽하게 일치한다. 스팩의 노예! 이것이 88만원세대, 전국의 대학생들의 현실이고 나의 우울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데, 그 중 몇 퍼센트나 장래 자기 직업이나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대학이 진리의 상아탑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금의 대학은 취업소개소로 전락한 듯 하다.

이처럼 여전히 우리는 불안에 사로잡혀 불확실성에 시대에 살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불확실성으로부터 도출된 외부적 불안으로부터의 탈피는 바로 학문함과 앎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배우는가? 인간두뇌의 메커니즘은 일어난 일이나 얻은 지식을 어느 정도 잊어버리게끔 되어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두뇌는 과거에 습득한 것의 극히 일부밖에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은 고생해서 배우고, 지식을 얻으려 하는가? 그 이유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지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지혜가 만들어 지는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손해만은 아니다. 수 만 마디의 사실보다 노인의 혜안으로 보는 ‘이해’가 더 정확할 수 있다. 지혜는 경험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메타인지라고 말하고 싶다. 즉, 아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지혜’이다. 그것은 더 나아가 ‘심오함’을 내포 한다. 그러므로 나는 ‘왜 학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하고 싶다.

아직 덜 익은 풋사과와 같은 청춘이 지혜를 말하는 것은 조금 주제 넘는듯하다. 하지만 지향점으로 둘 수는 있지 않는가.

원래 학문이나 앎에는 ‘시험 공부’라는 말이 대표하듯, 고통을 수반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무지는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수 있다.

우리는 무지로부터 벗어가기 위하여 어떻게 ‘앎’을 얻었을까?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고 지각한 사물을 통해 생각 즉 ‘인지’한다. 처음의 앎은 외부로부터 지식을 가져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감각으로부터 인지, 인식이르기까지 즉, 인간은 외부로 부터의 투쟁을 통해 내부적인 발전을 얻었다.

어떤 사실을 인지하는 방법은 분석과 종합이란 내부적인 과정을 거친다. 사람의 감각이나 심리 현상을 사람들의 상식으로 고정시켜 놓은 인상을 사실이라고 해두자.

다음으로 그 사실을 분석적으로 인지한다는 것은 ‘전제’ 그리고 ‘명제’, ‘검증’이라는 절차를 걸쳐 사실의 특정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종합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해당 사실의 모든 부분에 일정한 이해의 틀을 대입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사상과 철학이 소통의 창구가 되는것을 막을수가 없다. 색안경은 벗으려해도 벗겨지지 않을것이다. 다만 색안경의 렌즈색이 엷어질수는 있으리라. 자아를 초월한 물아일체의 경지의 초인이거나 성인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자기중심성에서 벗어 날수가 없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생각하는것 보다 자기를 더 객관화 되어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이 ‘이해의 틀’ 넓이는데 학문함의 이유가 또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내 언어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란 말처럼 학문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세계를 넓이고 타인을 이해하며 보다 자유로워 지기 위함 아닐까.

이 세상에는 확증할 수 없는 것이 무수히 많다. 가령 인간에게 잠재의식이 있다거나 그 의식 안에 문법과 관련된 언어 능력이 있다는 얘기는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기껏해야 ‘반증’이 나오기 전까지만 그렇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가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인간의 언어활동은 전부 가설을 만드는 데 쓰는 수단이다. 이런 언어활동을 총동원해서 확증도 할 수 없는 일에 그토록 열정을 쏟아 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은 확증할 수 없는 일에 확신을 품기 때문이다. 가설을 뒷받침하는 전제, 구조, 방향에 확신이 없으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힘도 자연히 약해진다. 즉, 자신이 발견한 전제, 구조,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 의심은 들지만, 그 의심을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얻는 어떠한 확신, 그것을 보통 ‘신념’이라고 부른다.

자기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덧없다고 여기는 풍조가 세계에 열병처럼 퍼져 있다. 다시 그 확신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까?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성찰해 보면, 특히 자신이 하는 말 안에서 역사, 철학 그리고 정신의 위대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느낌을 향한 신념, 그것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정신의 위대함에 대한 신념은 인문학이 갖는 고유한 힘이다. 니체를 허무주의를 말했지만, 니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니힐리즘이 허무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라고 니체를 재해석한다. 또 여전히 고대 그리스의 진선미를 향한 사랑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 즉, 절대 가치에 대한 갈망은 매우 숭고한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도 믿지 않는 이 남자는 자신의 악몽 안에서 그저 혼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마치 체스턴스의 예언이 적중한 것처럼 현대인의 허무감이 사이비 종교를 낳고 있는 것을 보라. ‘의심 행위는 확신을 전제로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인에게 의심을 끝까지 밀어붙인 끝에 얻는 어떠한 확신, 그것을 보통 ‘신념’은 매우 중요한 덕목중 하나라고 강조하고 싶다.

굳이 ‘신념’이 여전히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대체적으로 반증가능성을 갖지 않는 것은 ‘이성’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문학의 힘은 ‘통찰’ 있는 것인데 통찰은 ‘신념’을 전제로 때문이다.

정리하면, 우리는 불확실성에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가 구조화되고 거대화되면서 불확실성은 극복하려해도 극복되어지지 않는다. 불확실성은 의식의 통제를 넘어서 엔트로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를 초월하여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을 다스리고 자기발견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한다. 배워야 한다. 문명의 무기력함과 허무부터 지켜내기 위한 균형감각을 기르는 것을 배워야한다. 그것은 내적인 변화, 즉 앎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시대에 학문이 중요한 이유이고 학문하는 이유아닐까?

이로써 남겨진 문제는 무엇이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우선 나에 대해서 쓰고싶다.

솔직히 나는 요즘 고민이 많다. 훗날 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할지, 88만원 세대로 자유롭게 살아갈지, 나의 인생의 모습을 결정하기까지가 너무 힘들다. 유예기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나의 모라토리엄은 대체으로 부정적으로 소비되어 왔던 것 같다.

무기력 또한 문제인데, 기존의 나와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존재의 분리와 괴리로부터 느끼는 자기소외는 나의 무기력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 소외라는 고통스런 감각에 시달리는 것은 인간 정신만이 지닐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근원적인 자신을 온전히 찾지 못한다면 인생의 최종 결정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근원적인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이 어떤 근거 위에서 존립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으라’는 실존철학에 답을 구한다.

정체성의 탐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성질 가운데 가장 중심적이고 기초적인 성질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나는 누구인갗하는 물음은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 특유의 정신 작용이다. 나는 이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하겠다.

무한회귀의 시간 속에서도 미래를 보는 통찰은 필요하다. 역사의 반복성을 이해하고 불안과 불확실성에서도 그에 맞서기 위해 고독한 결단을 내리는 실천가가 되야겠다.

오로지 말로써만 앎이 존재한다면 그 앎은 오래간 나의 일부가 되어지지 못할 것이다. 앎이 내면화된 상태란 추상적인 그 앎이 구체적으로 완벽하게 나와 일치되어지고 나를 나타내는것인 상태가 되야할 것이다. 앎의 내면화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문함이 필요하다. 불가에서 쓰이는 돈오점수란 말이 있다. '돈오' 즉,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닫는 경지는 반드시 점진적인 수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것인데 앎의 내면화는 특히 돈오점수의 수행방식을 따르는것같다.

 

나는 앞으로 학문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 갈 것이다. 학문은 최선의 나를 찾기위한 과정이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고단한 전시적 인생이다. 그것은 공포와 불안뿐이다. 우등비교든 열등비교든 비교는 언제나 절망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동반한다. 아동, 청소년시기의 비교는 인간학습의 기제이지만 그것은 외부적 불안을 동반한 비교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불안을 동반한 비교는 패배감과 열등감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불안을 동반한 비교는 결코 성숙한 개인의 자세는 아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최선의 나를 찾는 것이다. 신체는 주체를 가졌으나 인간 정신이 주체를 갖지 못한 삶이 정체성이 있을까? 남과의 비교로 점철된 삶이 주체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비교로 정체감을 상실할 가능성이 내제되어있다. 불안에 의해 그대로 남을 따라하는 것 보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을 더 의미있게 만들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만의 길을 찾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타인의 행복과 불행으로부터 찾지말자. 최선의 나를 찾는 다면 나는 강요되지 않은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있을 것이다.

 

콜린 웰슨에 의하면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려고 공공연히 ‘존재하는 자’ 또는 ‘드러내는 자’를 아웃사이더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웃사이더를 가르는 세상 일반 기준은 틀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마치 세상과 등진 사람처럼 상황의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아웃사이더라고 여긴다. 그런 의미의 아웃사이더는 체제에 기생하면서 늘 반체제를 자처한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무책임하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임감은 인사이더에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책임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인데, 인사이드에게 그런 자유의지가 있을 리 없다.

반면, 진정한 아웃사이더는 상황의 바깥에 서서 상황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기 때문에 상황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비교적 자유롭게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콜린 웰슨의 ‘아웃사이더’라는 책에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여럿 등장하는 이유이다. 그럼 ‘아웃사이더가 진정한 인사이더’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우리 모두는 아웃사이더가 되야한다.

어쩌면 학문은 진정한 아웃사이더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닐까?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역사가 발전하듯 인간 정신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열매는 창조다. 창조는 앎을 전제로 한다. 우선 앎을 얻기위해선 생각을 해야한다. 그 생각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끈질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자신에게 학문함을 허하라!

- 임성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일을 당신이 알 수는 없다. Thought

당신이 알지 못하는 일을 당신이 알 수는 없다. 당신이 저지른 수 많은 나쁜 행동이나 혹은 좋은 행동들을, 지금의 당신은 알지 못한다. 언제나 한 발자국 물러날 때 그 행동들의 결과는 판가름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 발자국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도 않고, 저울의 중심부로 이동할 때, 0의 값에 가까워 질 때, 올바른 판단은 이루어 질 것이다.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 현재 자신의 판단은 깊은 느낌으로만 가능하다. 오직, 균형점으로 걸어감과 그 길에서의 느낌에만 충실하라.

언제나 자신은 스스로를 제대로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항상 당신의 현재의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해라. 이런 식으로 항상 쇄신하라.
이것만이 당신을 고인물이 되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사고함부터 신의 영역까지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거듭 흘러가야만 한다.

사고방식, 생활습관과 같은 작은 부분들.
사랑은 항상 처음과 같을 수 없으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나이듬 또한 어렸을 때의 매력과 늙어서의 매력이 있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변화시킴으로써 그 매력을 가질 수 있다.
...

FLEXIBLITY COVERS EVERYTHING.

A necessity 0f feedback Mutter

Walking on my way, hundreds of thoughts are inside, out. And then, I have two options to choose; one is walking along the way contiunally, the other is looking back: making an arrangement of my objective path, or motivations and emotions. In my experience, if I pass on the feedback, the second option above, I feel strange and awkward feeling at first, which makes me nervous and sometimes depressed, making me hard to proceed in the aspect of external life.

In recent days, I couldn't do that work due to the situation that I have been living with my girl firend, that I have hard time to live routine cause there're too many unsolved things of realtionship to deal with. Even more, I coulnd't have enough time to think, order, write, and feel deelply. Sooner or later, I should make my actit vely conscious spared time to do those things for the sake of my life.

Everything seems so ambiguous right now. But it would be fitted properly soon.


더 다가서는 아픔 Love

서로에게 더 다가서는 데에는 아픔이 따른다.
더 다가서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내면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몇 겹이 싸여있는 지도 모르는 껍질을 벗기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은 그 아픔으로 인해서 피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부끄러운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데에는 과거의 경험들이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사랑을 하는 데에는 과거의 경험들이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상처들로 인해서 고통이 따르는 일에 극히 거부반응이 생겨 버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을 보면서 과거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과거의 것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비교가 되는 순간 그 관계는 죽은 것이 되어 버린다.
다가서면 아프다. 맨 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 벗지 않는 갑옷을 입고 있으며,
보통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완벽한 매커니즘을 셋팅해 놓는다.

고통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준비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고통이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 될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또, 많은 사람들은 그 과정 속에서 포기하는 것 같다. 무척 힘들고,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도 없기에.

방향성. 우린 옳은 길을 가고 있다.
그게 아닐지라도,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옳은 길을 걷고 있다.





연애, 동거 Love

연애와 동거는 관계에 조금 다른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함께 삶으로써, 행동이나 생각이 기본적으로 함께 한다는 개념이 많이 개입되고,
그래서 더욱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연애를 한 후에는 결국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간다는 생각이 기본적이라면,
동거를 하면 결국 함께 한다는 생각, 그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서로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 들면서 좀 더 안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로 이어지는 것 같다.
물론 동거를 하면서 생기는 다른 문제점들이 있을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고, 불안하지도 않다.
또한, 서로의 본 모습을 더 잘 나타내지 않는가 싶다.


방해물의 직면 Love

하루 종일 붙어 있어서 일까.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처음 지내는 순간부터 서로가 너무 익숙했었으니깐.
서로 많이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다. 함께 있어도 그립다.
그 만큼, 갈등의 순간도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갈등은 상대방에 대한 것도 있지만,
자신에 대한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사소한 걱정과, 의심과, 생각들.
혼자서 갈등을 하기 시작한다. 이 뿌리깊은 비판적인 습관들.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을 하는 가.' 그리곤 상처를 주기도 한다.
윤미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도 인간, 여자이니깐.
사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오히려 평균 이상으로 민감한 사람이다.
표정만봐도 나를 다 읽어 내니깐.
근데 중요한 것은 함께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있다.
나에게 그녀에 대한 믿음이 있냐고 질문한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But if I ask her that she has faith in me, then she would answer 'yes'.
I just know that she basically, fundamentally believes in me and the love regarding our relationship.
At the same time, internally I would answer to myself that I do as well as she does.
Everything can't be same all the time between us cause we differ in egoes.
If we feel common things in soul, however, it is possible to feel like being in heaven.


일상과 천국 Daily

이제 공부에 다시 손을 잡고,
좀 더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고,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다시 일상의 풍경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더 편안해진다는 의미일까, 뭘까.
어쨌든 지금은 마음이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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